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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서상돈상 받는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 섬유 산업 외길 인생, 휴먼스토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4-04 조회수 : 1926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제품을 차별화함으로써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는 것이 지역의 미래 산업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10회 서상돈상 수상자로 선정된 노희찬(75) 삼일방직㈜ 대표이사 회장은 “너무 큰 상이라서 더 좋은 분을
찾길 바라며 처음에는 사양했다”며 “중소기업 사상 처음으로 받았던 금탑산업훈장보다 더 소중하고 영광”이라
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저를 포함해 모든 시민이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국채보상운동과 이를 주도
한 서상돈 선생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기회로 삼을 것”을 당부했다.

노 회장은 한국 섬유산업을 대표하는 경영인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섬유업에 종사하면서 40년이 넘게 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품질혁신으로 섬유산업을 이끌어왔다. 정부가 세계 일류 상품으로
지정한 신제품을 개발하는 등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브랜드를 창출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은 원동력입니다. 초기에는 코팅기술을 앞세웠습니다. 이후 너도
밤나무에서 추출한 천연섬유인 ‘모달’을 활용해 강도가 높고 물세탁이 가능한 제품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보풀
이 적게 나오고 깨끗하고 안정된 원단과 불과 외부 충격에 강한 기능성 제품 등 최근까지도 세계적인 기술과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경북 영천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노 회장은 대구공고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2년 고교 졸업과
함께 당시 선망의 직장이었던 제일모직 특채를 포기하고 내외방직에 지원해 입사했다. 내외방직이 당시 최신
독일 기계를 수입해 염색가공 공장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코팅기술을 개발했다. 일하면서 배움을 멈
추지 않았다. 주경야독한 결과 1968년 영남대 화공과를 졸업했다. 노 회장은 도전정신으로 1970년에는 대전
의 풍한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최고의 기업인 제일모직을 포기한 것은 염색가공기술에 대한 열망과 도전정신 때문입니다. 제일모직에
입사해 방직과 직물, 염색 중 원하지 않는 분야를 맡는 것보다 규모가 더 작더라도 염색기술을 꼭 배우고 싶었
습니다.”

노 회장은 1972년 10월 창업했다. 3공단 입구에 500여㎡(150평) 공장 건물을 빌려 직접 제작한 기계를 설
치했다. 첫 일은 인조 모피 백코팅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친칠라 코트가 유행했고, 혼숫감으로도 인기가 있
었다. 특히 실버코팅을 개발해 모피 뒷면을 깨끗하게 하고, 털도 잘 빠지지 않게 개선했다. 1975년 9월에 공
장을 이전하면서 생산라인을 늘려 사업을 키웠다. 1973년 석유 파동과 1997년 IMF 외환위기와 같이 어려운
고비를 기술개발과 시설 자동화 등 경쟁력 강화로 극복해왔다.

“햇빛을 견디고 방수와 내수압 기술이 뛰어난 나일론 제품을 일본에 수출하면서 석유파동을 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최신 에어제트 직기와 공조 설비 등 시설 자동화를 통해 IMF를 이겨냈습니다. 기술력으로 제
품을 차별화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노 회장은 지역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섬유경영인으로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펼쳤다. 대구경북염색공업협동
조합 이사(1976년)와 한국염색공업협동조합연합회 이사(1977년)에 이어 대구염색산업공단 이사(1981년),
한국섬유기술진흥원 이사(1984~1996년) 등을 두루 거쳤다.

2008년 지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경제 5단체 중 하나인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한국섬유기술
연구소 이사장도 함께하면서 업계의 변화를 모색했다. 지역 섬유업체의 글로벌 마케팅과 연구개발 역량을 높
이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고부가가치 섬유제품 생산에 이바지했다.

지역사회 공헌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2001~2006년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갈등을 유발했던 상공의
원 직접선거를 없애고 상공인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표를 얻고자 회비를 대납하는 등의
문제를 뿌리 뽑았다. 특히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의 회장 합의추대라는 전통을 만들었다. 회원사로부터 기금을
받아 재정적으로도 기틀을 다졌다.

국내 최초로 시민축구단 구단주를 맡아 4만5천여 명의 시민을 주주로 참여하게 했다. 구단의 대표이사와 이사
회 의장까지 함께하면서 시민축구단을 꾸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또 정부로부터 500억원의 지원을 이
끌어냄으로써 디자인 인력 양성의 요람인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유치에 성공했다.

“지역에서 해마다 졸업하는 디자인학과 인재가 1천 명이 넘습니다. 이들이 실무 능력을 키우고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지역의 기업들도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디자인센터는 지역 경
제에 미치는 유무형의 자산가치가 큰 곳입니다.”

노 회장은 대구상의 전신인 대구민의소가 발의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 성금 모금을 주도했다. 대구경북 애국지사의 항일독립운동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
념관 건립 모금에도 전면에 나섰다. 그는 이런 공로로 중소기업중앙회장상(1984년)과 철탑산업훈장(1987
년), 체육훈장 맹호장(2004년), 금탑산업훈장(2012년) 등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작더라도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교훈을 준 국채보상운동을 지역의 선배 상공인과 주민들이 이끌었습니다.
나누고 베풀던 그들의 정신을 오늘날 상공인은 물론 시민들도 함께 이어가길 바랍니다.”


매일신문 - 서광호 기자 kozmo@msnet.co.kr
  첨부파일 : 20180402_201017000.jpg (24.8KB)  

  게시기간 : 2018-04-04 ~ 2023-12-31